60년대 시골 상비약…유신때 ‘대마초 피우면 최고 사형’

암울했던 유신 시절 우리나라에선 대마초를 갖고 있거나 상습 섭취하다 적발되면 사형까지 가능했다. 1976년 4월 만들어진 대마관리법이 그랬다. 그로부터 6개월 뒤인 그해 11월 미국 워싱턴디시(DC)에선 대마 재배 혐의로 기소된 이가 무혐의로 석방됐다. 그는 이후 미국 최초로 의료용 대마 사용을 승인받은 인물이 됐다. 같은 해 한국과 미국에서 내려진 서로 다른 결정은 아직까지 대마에 대한 우리의 국민적 인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의료용 대마 합법화운동본부’를 설립한 강성석 목사는 “당시 군사정부는 대마를 하고 자살 충동을 느껴 자살하거나, 폭력적 성향으로 변하거나, 환각 증상을 겪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홍보 영화나 뉴스 영상을 제작해 상영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마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이 모두 이 시기에 생겨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정부 단속 이전인 1960~70년대에만 해도 대마초는 농촌의 상비약이었다. 키우던 개가 아프면 대마 삶은 물을 먹였고 술에 담가 약으로 쓰기도 했다. 농가의 삼베 재료였고 어망이나 밧줄, 옷감도 대마로 만들었다. 담배가 없어 대마잎을 말아 피웠지만 문제가 되진 않았다.

대마가 단속 대상이 된 건 주한미군 때문이었다. 한국 대마는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티에이치시(THC) 함유율이 높은 편이었는데, 이를 환각제로 쓸 줄 몰랐던 한국인과 달리 미군들은 이를 ‘해피 스모크’라 부르며 즐겼다. 주한미군의 마약 관련 범죄가 늘고, 대마초 유통 과정에서 이런저런 문제들이 발생하자 미군은 한국 정부에 대마를 단속해 달라고 주문(1970년 6월)했다. 이후 대마는 장발이나 미니스커트와 함께 경찰의 단속 대상이 됐고 이어 습관성 의약품으로 규정돼 관리되기 시작했다.

대마가 본격적인 ‘마약’의 지위를 얻게 된 건 10월유신 이후인 1976년이다. 최고형이 사형인 대마관리법이 제정되면서부터다. 속설로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록의 대부’ 신중현에게 자신의 찬양가를 만들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뒤 예술인들을 잡아들일 목적으로 무리하게 법을 제정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아무튼 이후 대마관리법은 마약류관리법에 통합됐고, 대마는 다른 마약과 함께 지금까지 규제 대상으로 남아 있다.

2000년대 초 연예인들이 중심이 된 합법화 운동이 일기 전까지 대마는 줄곧 한국에선 금기였다. 2005년 헌법재판소의 기각 판결 이후 관련 흐름도 완전히 끊겼다. 강 목사는 “의료용부터 먼저 합법화한 외국과 달리, 당시 즉각적인 완전 합법화를 목표로 한 운동의 전략 문제도 있었던 듯하다”고 말했다.

By | 2017-11-13T14:02:24+00:00 11월 13th, 2017|뉴스|60년대 시골 상비약…유신때 ‘대마초 피우면 최고 사형’에 댓글 닫힘